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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 중심지 위치 문제와 형성시기에 대한 개인적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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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ras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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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ras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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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ined: 5 years ago

고조선의 중심지 문제와 그 국가형성 문제는 오래전부터 끊임없이
제기해오던 것이고, 이것은 아직까지도 문제제기가 될 정도로
역사학계에서는 버릴 수 없는 떡밥이자
영원히 논쟁이 될지도 모르는 문제다.
그리고 이러한 논쟁에서 대안점으로서 나온 것이
중심지 이동설이고 이것은 현재 학계에서
통설로서 90년대 이후 무리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리고 중심지 이동설에서
최근 고고학자들을 중심으로 제기되는
흥미로운 학설이 고조선 요서 중심지설이다.
물론 요서설이 과거에도 제기가 되기도 하였으나
이들은 명확한 근거가 없거나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진행된 것이라 잘못된 결론으로서 도출된 것들이다.

2000년대 초중반에 들면서 그 동안 축척된 발굴조사성과를
바탕으로 중국 동북지역의 청동기문화에 대한 여러 성과들이
나왔고, 이는 종족 문제와 결부되면서 흥미로운 결론들이 도출된 것이다.
그것 중 하나로서 고조선 요서 중심지설이 대두된 것이고
이는 요서의 하가점상층문화의 지방유형으로서 봤던 십이대영자유형에 대해
기존의 시각을 비판하고, 이를 독립적인 하나의 문화유형으로서
비파형동검문화에 속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자연스레 그 동안
동호라고 보았던 시각에 대해서도 비판적이게 된 것이다.

물론 이는 그 동안 축적된 문헌사료의 연구도 한 몫하였다.
산융과 동호를 당고시대로 보았던 전근대적 시각에서 벗어나
산융과 동호를 각각 춘추시대와 전국시대에 존재했던 융과 호의
집단으로서 보기에 이르렀고, 특히 관자의 고조선에 대한 기록은
그 동안 고조선 집단의 형성시기를 기원전 4세기경으로 보던 것을
기원전 7세기경까지 올리게 된 것이다.
이러한 문헌적 성과와 고고학적 성과를 바탕으로 이 시기에 존재했던
문화유형을 종족집단으로 구분해냄으로써 이런 결론이 도출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요서설은 고고학자들이 주장한 것이다보니
문헌적 근거는 매우 부족하다. 달랑 해봐야 관자 소광편의
북쪽으로 산융 고죽 예맥에 이르러 그 왕 태(진?)하를 사로잡았다는
기록 뿐이다. 이 소광편이 만들어진 연대를 한나라대로 보고 있는데다가
이 기록 외에는 이와 유사한 기록에서 예맥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예맥에 대한 기록은 과장되었거나 후대에 덧붙여진 신뢰하기가 힘든 기록이다.

다만 고고학적으로는 나름 설득력이 있다.
청동기시대에 들어서면 청동기를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장인집단이 등장하는 것으로 추정한다.
이 시기(B.C 9~7세기) 요서 지역 일대에서만 등장하는 유물로서
다뉴기하학문경과 T자형청동제검손잡이가 있다.
다뉴문경과 T자형검병의 몸체에 새겨진 기하학적 무늬는
매우 정교하고 복잡하다. 이는 이를 제작하는데
엄청난 시간과 비용이 든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고,
이것은 전문장인집단이 이러한 유물을 만들었다고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나 다뉴문경이 출토하는 유적의 유물갖춤새는
청동기시대에서 가장 최상위급 유물들이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집단은 요동의 토착집단과의
교류를 통해 비파형동검문화를 전파하고 있고
요동지역에서는 지배층으로서의 위용을 뽐내기 위해
이를 받아들였고, 아직 청동제작기술이 부족하여
간단하게 만들 수 있는 소형의 청동공구류와
같은 유물들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이러한 교역을 통제할만큼 힘이 있고
요서지역일대를 정치 문화 사회 경제적으로 통제하는
강력한 지배자가 등장했기에 가능한 것이라 추측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집단이 중국 특히 제나라와의 교역을 통해
중국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관자 등의 문헌에서
기록된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조금 더 고민해봐야 할 문제이다.
먼저 관자의 기록에 대한 것이다.
최근 관자는 전국시대 직하학궁의 제자들이
관자라는 이름을 가탁하여 이를 지은 것이라고
보는 것이 통설이다. 그렇다면 관자 대광편도
역시나 전국시대에 기록됐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것은 관자의 기록 외에는 전부 전국시대 이후에
고조선이 문헌에 등장하는 것으로서 알 수 있다.

또 이 시기에 산동반도 일대에는
래이(萊夷)족이 존재하였다.
래이족은 강태공이 제에 분봉받기 이전부터
산동반도의 교래하 동쪽 일대에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 멸망 시기는 대체적으로 기원전 6세기 중반경
으로 보고 있고, 이 때에 제나라가 산동반도 일대 전체를
석권한 것으로 학계에서는 보고 있다.

또 중국 사료인 이아에는
"동북방의 좋은(美) 물건으로 척산의 문피가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척산은 현재의 산동반도 동쪽 끝인
영성시 일대로 비정되고 있다.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관자의 대광편을 인정한다면
엉뚱하게도 고조선과의 교역 대상은
제가 아닌 래이족과의 교역이 되는 것이다.
또한 최근 연구성과에 의하면 산동반도 일대에서
요동지역과의 교역을 추정하는
비파형동검과 고인돌 그리고 부채꼴형도끼가
발견되었다. 이들 유물들은 대부분 래이지역에서
발견되었고, 기원전 6~5세기경으로 추정되는 것들이다.
도끼의 경우 기원전 8~6세기경의 유물이라고 추정하지만
정식발굴을 통해 얻어진 것이 아닌
주민의 신고에 의해 수습된 유물이어서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고
이 유물이 수습된 주변에서 조사된 유적들이 대부분 전국시대로
추정된다고 하므로 이것을 교역품임을 고려하면
이 유물도 기원전 6~5세기경에 유입되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거 같다.

즉 이것은 관자 대광편의 기록은 춘추시대의 기록이
아닌 전국시대에 있었던 사실임을 말해주는 것이며
이는 고조선과 제와의 문피 교역이
춘추시대가 아닌 전국시대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기존의 문헌사학자들은 관자의 기록을 춘추시대로
추정하곤 하였는데, 이는 고조선의 국가형성 연대를
끌어올리기 위해 무리하게 관자의 기록을
관자 당대 기록으로서 바라본 것이 아닌 가 한다.

그렇다면 이는 고고학자들의 요서중심지설도
타격이 가해진다. 관자의 기록이 춘추시대임을
인정하여도 자연스레 문제가 발생하는데
위의 이아 석지편에서는
"동방의 좋은(美) 물건으로 의무려에 있는 순우기가 있다"
라 기록하고 있다. 의무려는 현재의 요서와 요동을
가르는 경계선 역할을 하므로
동북방은 자연스레 요동지역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위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산동반도일대에서 발견되는 청동기물품은
요서가 아닌 요동일대의 유물들이 발견되고 있다.
지석묘는 요하를 경계로 그 이동에서만 분포하고 있고
부채꼴형도끼도 요동지역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교역이라는 것이 중심지에서만 교역한다는 법은
없지만, 형성초기에 요서에서 발생한 고조선이
요동지역까지 진출하였을지 의문이다.

거기다 문헌의 제와의 교역상도 춘추시대가 아닌
전국시대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도 이 일대가
고조선의 중심지로서 역할 뿐만 아니라
기존에 봤던 기원전 10~7세기경으로 보았던
고조선의 형성 시기까지도 재고해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덧붙여 요서가 고조선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하였다면
요동과 평양 일대의 토착집단이 누구냐는 것도 밝혀야 할 것이다.
요서설은 요동설이나 평양설과 같이 이 일대의
집단에 대해 아무런 규명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도 원래는 고조선 요서 중심지설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최근에 읽은 한 논문으로 이러한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고조선의 중심지는 어디며, 형성시기는 언제일까?
개인적 생각으로는 산동반도일대에 발견되는 요동지역의 유물 중
비파형동검이 정가와자유형과의 양식이 비슷한데다
이 주변 일대에 이러한 유물이 나타나는 연대가
정가와자유형의 형성시기인 기원전 6~5세기와 맞물리므로
정가와자유형을 중심으로 주변 종족 집단이 결집하여
고조선이라는 정치체가 탄생한 것이 아닌 가 한다.

한밤 중에 짧게나마 정리하려고 했지만
이래저래 두서 없이 길게길게 적어보았습니다.
그냥 쭈욱 생각나는대로 쓴 거라 부족한 것이 많습니다.

어제 블로그에 썼던 글인데 문맥이 맞지 않거나
논지전개가 부족한 부분에 대해서 추가하고
또 추가해서 좀 더 글을 보강하였습니다.
그래도 많이 부족할 거라 봅니다.
많은 지적 부탁드리겠습니다.

사진들은 전부
박준형『산동지역과 요동지역의 문화교류 - 산동지역에서 새로 발견된 선형동부를 중심으로』2014 한국상고사학보 79호 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제일 첫번째 올린 지도의 경우 제가 설명을 위해 임의로 편집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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